나무의 말이 좋아서

 

 

생태ㆍ과학ㆍ역사ㆍ문화를 아우르며 펼쳐지는 다채롭고 경이로운 숲과 나무의 세계
사계절 나무가 들려주는 삶의 본질과 존재의 가치에 관하여

 

숲과 나무의 삶의 방식과 원리를 역사적ㆍ철학적ㆍ생태학적ㆍ문화적 관점에서 담아낸 포레스트 에세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이 의미 있는 삶인가’를 고민하는 시대에, 자연의 오랜 지혜가 살아 있는 숲과 나무의 철학을 전한다. 무채색 단조를 벗고 살갗을 트며 꽃을 피우는 봄,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잎사귀로 하늘을 채우는 여름, 단풍으로 이별을 알리고 열매로 미래를 여는 가을, 배려와 존중으로 가지를 뻗어 숲을 사랑장으로 만드는 겨울까지. 공존과 나눔, 포용 등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존재로서 오랜 시간을 우리와 함께해온 나무를 통해 뻗은 사유의 가지를 사계절 12달의 변화로 풀어냈다. 다양한 시와 노래로 버무린 문학적 감성, 특유의 관찰력과 풍부한 자료, 인간과 자연에 대한 심도 깊은 통찰이 더해진 우리 숲 안내서. 이제 나무의 말에 귀 기울이며 떠나는 경이로운 숲 세계로의 여정이 시작된다.


책 속에서

봄이 왔다. 꽃이 먼저 필까? 잎이 먼저 나올까? 생강나무도 산수유도 꽃이 먼저 나와 한바탕 잔치를 벌인 다음에야 잎이 나온다. 왜 꽃을 먼저 피울까? 나무가 꽃을 피운다는 것은 제 살갗을 찢는 고통이다. 그만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꽃을 피운다. 나무에게는 꽃이 바로 짝을 만나는 생식기관이요, 그 속에 온갖 지혜를 다 모은 자손 번식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이른 봄 잎을 먼저 내기 위해 에너지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겨우내 먹거리에 시달리던 초식동물들의 공격에 남아나지 못했겠지. 그러다가 에너지는 고갈되고, 결정적으로 꽃을 피우지 못해 더 이상 생명의 연속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를 택한 나무들은 벌써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없다. 진화라는 시간 열차에 오르지 못하고 탈락한 것이다. 꽃부터 피워 유전자를 계승시키고, 그다음에 몸집도 키우고 멋도 부린다. 나무도 생각하면서 산다. _pp.21~23
소나무도 예외가 아니다. 꽃가루를 아무리 많이 날려 보내도 자기 암꽃에 닿으면 말짱 허사이다. 그것은 무성생식과 다를 바 없다. 그럴 바에야 제 몸을 떼어서 자손을 만드는 것이 낫지. 하지만 소나무는 현명하다. 아래쪽 수꽃이 익어 꽃가루가 날아가고 나서야 비로소 암꽃이 핀다. 그렇게 늦게 핀 암꽃 위로 다른 소나무에서 만든 꽃가루가 날아와 앉는다. 꽃 피는 시기를 조절하여 근친간의 수정을 회피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생각을 게을리했다면 지금 존재하지도 못했겠지. 환경 변화를 감지하고 진화의 방향을 읽었기에, 그리고 부지런히 방책을 마련하고 변신을 거듭해왔기에 소나무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_p.54
단풍은 나무가 선택한 생존 전략이다. 한 잎 한 잎 저마다의 소임을 끝내고, 최후로 벌이는 그들만의 컬러 페스티벌이다. 나무는 모든 사치를 버리고 미니멀리스트로 겨울을 견뎌낸다. 혹한기에 나무가 잎을 달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공기 중의 수분 퍼텐셜(potential)에 반응해 뿌리부터 물을 끌어 올려 공기 중으로 퍼나르는 작업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극한의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모든 세포가 죽은 듯 고요한데, 잎이 뜬금없이 일하고 있으니 속이 탈 노릇이다. 결국 나무는 수분 밸런스를 잃고 말라 죽게 된다. 이런 참사를 막기 위해 나무는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잎에 있는 영양분을 뿌리 쪽으로 회수한다. 그리고 무소유의 잎사귀를 떨어뜨린다. 이 과정에서 잎이 색을 바꾸고 나뭇가지에서 떨어져나간다. 나무가 잎을 떨치는 것인지, 잎이 나무를 떨치는 것인지. 어찌 됐든 버리는 용기와 결단이 있기에 새로운 출발을 기약할 수 있다. _p.141
무더위가 한창일 때에는 분명 맛도 떫고 육질도 단단했다. 새도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모든 유전체를 씨앗 속에 담았으니 어서 빨리 새들을 유인해 어미나무로부터 멀리멀리 떠나가야 한다. 그냥 오라고 하면 마음 상하겠지. 새콤달콤한 육질에 빨간빛 메이크업이 선명하니 직박구리, 어치, 박새, 딱새, 동고비…… 모두 모여든다.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알알이 박힌 빨간 열매들, 그리고 그 사이로 날아드는 숲 새들의 날갯짓이 분주하다. 팥배나무 가지에 올라앉은 어치가 나를 바라본다. 이내 익숙한 듯 분주히 고갯짓한다. 부리에 물고 있는 빨간 열매 한 알이 비로소 내일을 만난 듯하다. 어치가 내려놓는 어느 곳에서인가 굳세게 자라나길 기대한다. 십일월 어느 날 오후 계룡산 꼭대기, 멀리 떠나려는 나무 열매들과 먹이를 얻으려는 새들의 카니발이 한창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손님이다. _p.158
대팻밥처럼 껍질이 세로로 말린 다릅나무, 코르크층이 두툼하게 덮여 골이 파인 굴참나무, 다이아몬드 모양의 피목이 조밀하게 새겨진 까치박달나무, 오래된 나무 묘비처럼 작은 껍질 조각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비목나무, 회색빛 시멘트 전봇대처럼 허여멀건 서 있는 느티나무. 숲에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나무들이다. 하얀색 껍질이 종잇장처럼 여러 겹으로 붙어 있어 불에 태우면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 바로 자작나무이다. 자작나무와 비슷해 보이나 비교적 껍질이 누런색인 거제수나무도 있다. 박달나무는 볼품없이 두껍고 큰 껍질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말채나무는 감나무처럼 작고 두꺼운 조각 껍질이 투박하게 뒤덮여 있다. 숲속에 웬 감나무가 있나 오해할 만도 하다. 층층나무는 매끈한 나무껍질에 하얀색 선 무늬가 세로로 새겨졌는데, 마치 지렁이가 무수히 기어가는 듯한 모습이다. 층층나무를 지렁이나무로 기억해도 좋겠다. _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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