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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소설가는 헤매고 또 헤매는 사람입니다"
《침묵》의 엔도 슈사쿠가 쓰고 읽고 들려주는 구원의 소설, 소설의 구원

 


그리스도교 문학의 정점 《침묵》의 작가, 일본의 대문호 엔도 슈사쿠의 강연집. 대표작 《침묵》을 비롯한 《사무라이》 《스캔들》 등 자신의 작품에 얽힌 창작 비화와 집필 의도, 프라수아 모리아크의 《테레즈 데스케루》와 그레이엄 그린의 《사건의 핵심》, 쥘리앵 그린의 《모이라》,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등 20세기 유럽 문학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엔도 슈사쿠의 목소리로 듣는다.

 

이 책의 원제 ‘인생의 후미에(人生の踏?)’에서 ‘후미에(踏?)’는 에도시대 그리스도교 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예수상이나 성모 마리아상을 동판에 새겨 나무판에 끼워 넣은 것으로, 이를 밟으면 용서받지만, 밟지 않으면 곧바로 죽임을 당하거나 고문을 받는다. ‘인간은 후미에를 밟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경우가 있다’며 신념을 배반해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약점과 슬픔을 위로하며 자신의 인생관, 종교관, 문학관을 들려준다. 

 

 

 

책 속에서

예수상이 새겨진 동판인 후미에(踏?)를 밟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당시의 기리시탄에게는 자신이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의 얼굴,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 자신이 이상으로 여기는 사람의 얼굴을 밟는 일이었습니다. 예컨대 연인의 얼굴을 밟으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습니까? 안 밟으면 고문하고 죽여버리겠다고 한다면 밟겠습니까? 저라면 아내의 얼굴을 밟겠지만요.(강연장 웃음) 여러분, 지금 웃었습니다만, 이 부분이 이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에도시대 기리시탄의 후미에와 마찬가지로 전쟁 중 우리 역시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여기는 신조, 동경하는 삶, 그런 것을 흙 묻은 신발로 짓밟듯이 살아야만 했습니다. 전후(戰後) 사람들이나 요즘 사람들 역시 많든 적든 간에 자신의 ‘후미에’를 갖고 살아왔을 겁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후미에를 밟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_17쪽 
우리 소설가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인생을 알 수 없고, 인생에 대해 결론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손으로 더듬듯이 소설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인생에 대해 결론이 나오고 미혹이 사라졌다면 우리는 소설을 쓸 필요가 없겠지요. 소설가는 헤매고 또 헤매는 사람입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고 손으로 더듬어가며, 인생의 수수께끼에 조금씩이라도 다가가고 싶어서 소설을 쓰는 겁니다. _18~19쪽
우리는 순교한 사람들을 존경하지만, 배교한 사람들을 경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도 그런 상황에 놓였다면 밟았을지 모르니까요.
그들도 인간인 이상, 그들에게 목소리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을 침묵의 재 안에서 불러일으키고 싶었습니다. 침묵의 재를 긁어모아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침묵’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아울러 저는 박해 시대에 그렇게 많은 탄식과 피가 흘렀는데도 왜 신은 침묵했을까, 하는 ‘신의 침묵’과도 겹쳐놓았습니다. _25쪽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아름다운 것이나 매력 있는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바보라도 가능하지만 퇴색한 것, 낡아빠진 것, 많이 봐와서 싫증난 것에 마음이 끌린다거나 계속 갖고 있는 데에는 재능과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잖아요.(강연장 웃음) 아니, 웃으면 안 됩니다. 인생은 모두 그런 것입니다. 인생은 매력 있는 것, 아름다운 것, 반짝이는 것이 아니기에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버린다는 것에는 자살이나 자포자기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인생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_28쪽
이렇게 사람들 앞에 나서면 싱글벙글 히죽거리고 있지만 집에서는 가끔 ‘가스나 틀어놓고 죽어버릴까’ 생각합니다. 어차피 저는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고, 너무 오래 살아도 재미없을 겁니다. 하지만 자살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단 무섭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비겁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비겁하달까, 인생에 대한 애정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_29쪽 
우리가 함께 읽으려는 그리스도교 작가들, 프랑수아 모리아크와 그레이엄 그린, 조르주 베르나노스, 쥘리앵 그린은 어떤 주의나 사상의 올바름을 증명하기 위해 소설을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보통의 소설가와 마찬가지로 보통의 인간을 그리기 위해 소설을 썼습니다. _46쪽 
거듭 말하지만 진정한 인간을 그리고, 거짓 심리를 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모리아크는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진정한 인간을 그리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말하면 ‘어둡고 지저분한 부분’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소설가라면 그런 부분을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자신을 우선시하여 그것을 피해버리면 팸플릿 소설, 호교 소설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소설가의 의무로 깊이 파고들면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자신이 파괴될지도 모릅니다. _50쪽 

그레이엄 그린이 “성인을 제외하면 죄인이 바로 사물의 본질이다”라고 단언한 것은, 더러워진 인간의 행위, 죄를 범한 인간의 마음에 신이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그레이엄 그린도 그런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신은 죄인에게 대답해줄 거라는 희미한 희망을 갖고 있었겠지요.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진정한 신앙은, 확실히 말하자면 99퍼센트의 의심과 1퍼센트의 희망이다”라고 썼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_100쪽
신은 결코 우리에게 안심입명(安心立命) 같은 걸 주지 않습니다. 싱글벙글 웃는 아버지 같은 얼굴로 안심입명해서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며 살고 싶다면, 그렇게 살 수 있는 세계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쪽으로 가는 게 낫습니다. _101쪽
인생은 결코 기쁜 것도, 즐거운 것도, 매력적인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닙니다. 실은 비루한 것이지요. 여러분도 여러 가지 경험을 해서 아시겠지만, 인생은 지저분해서 눈을 돌리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결코 내팽개쳐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맛보라고 하지요. 그것이 ‘예수를 본받는’ 일이며 인생이라고 보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근본 개념입니다. _110쪽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충동이 아닙니다. 정열이라든가 연민의 정이라든가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교 용어로 그것을 ‘상태이지 행위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충동은 상태입니다. 선도 악도 아니지만, 사랑도 아닙니다. _116쪽
육욕에 시달리는 남자든, 질투에 고심하는 여자든, 인색한 아저씨든, 많이 먹는 아주머니든, 사디스트나 마조히스트든 자신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부분에서 신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자신을 돌아보게 할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저는 곧바로 교회의 목사님이나 신부님들로부터 야단을 맞을 겁니다. 아니, 물론 좋은 부분에서도 신은 여러 가지로 말을 걸어오겠지만 적어도 지금 제 생각으로는 인간의 가장 비루하고 약한 부분, 어떻게도 해볼 수 없는 부분을 통해 신은 말을 걸어옵니다. _138쪽
그래도 계속 성서를 읽어오며 제가 깨달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첫 번째는 예수라는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 굉장히 무력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분이었다는 생각이 성서에 일관되게 나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가 활동했던 기간은 불과 3년 정도인데, 그 시기에 많은 사람의 찬양을 받던 때도 있었지만 결국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친했던 그의 친구나 제자들도 그와 그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성서가 말하려는 것은 이 두 가지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_162쪽
환자의 손을 어루만지는 행위에는 위로하는 마음이나 다정함과 동시에 자기현시나 자기만족, 허영심 같은 것도 섞여 있습니다. 그것은 수녀분 자신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결코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인 이상 좋은 일을 자기만족 없이, 완벽하게 사심 없이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나는 사심 없이 하고 있어. 자기현시욕 같은 건 전혀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짓말쟁이일 겁니다. 사람이 훌륭한 일을 할 때 에고이즘은 반드시 섞이겠지요. 이는 인간의 업 같은 것으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건 틀림없는 일이고, 그래서 저는 존경합니다. _207~208쪽
보디랭귀지로 나오는 무의식은 간단합니다. 좀 더 깊은 데서 작동하는 무의식이 있습니다.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자신이 있는 거지요. 그런 자신은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를 불행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 자신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은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고, 정의의 편이라고 믿을 수 있고, 타인이나 사회를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뭐, 그런 점이 없으면 비판 같은 걸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요. _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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